중앙일보 주간중앙 칼럼 - (강영만 감독의 영화노트) 글쓴이 강영만 감독은... 93년 홍익대 미술대학 졸업 후 94년 도미. 뉴욕 맨하튼 The New School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했다. 2000년 9월 '큐피드의 실수(Cupid's MIstake)'으로 감독 데뷔, 같은 영화로 최저예산 제작 기네스북 기록을 만들기도 했다. '퍼스트 테스트먼트(1st Testament: CIA Vengeance)'등을 연출. 2002년 미국내 아시안 마사지 팔러를 그린 '비누 아가씨(Soap Girl)'는 빅베어 국제 영화제 청중상을 받았다. 움직이는 그림이 좋아 영화를 시작했다는 그는 웃을때면 그의 고향 충남 서산의 흙냄새가 그대로 느껴지는 소박한 남자다.
Tuesday, January 04, 2005
5. 시민 케인(Citizen Kane)
2004년 1월 3일
5. 시민 케인(Citizen Kane)
감독: 오손 웰즈
오손 웰즈와 VS 윌리엄 랜더프 허스트
지난 크리스마스때 샌프란시스코를 다녀오다가 허스트 성(Hearst Castle)를 관광했다. 바로 전에 그 성이 위치해 있는 캠브리아 지역에 강진이 있었다. 함께 갔던 시나리오 작가친구 애론은 지진 때문에 가길 꺼려했으나 난 기필코 그곳을 방문하고 싶었다. 그 이유는 영화 역사상 베스트 10 중의 하나로 꼽히는 '시민 케인'의 원래 이야기 장본인인 윌리엄 랜더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의 성을 꼭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101 하이웨이에서 46번 지진으로 갈라진 도로를 서행하며 아름다운 태평양이 눈에 들어왔다. 1번 해안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20분 운전해서 허스트 성에 도착했다. 지진으로 전세계에서 구입해온 조각상들이 몇 개 바닥에 떨어져 깨져 있었다.
윌리엄 랜더프 허스트는 20여개가 넘는 신문사들와 잡지사들 운영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사나이다. 그는 2개의 영화스튜디오도 운영했으며 이곳 언덕에 그의 부의 상징인 성을 지은 후 할리우드의 유명인사들을 성으로 초대해 성대한 파티를 했다.
45분짜리 허스트의 인생 다큐멘타리를 아이맥스 극장에서 관람했다. 혹시 '시민 케인'에 대해서도 언급하려는지 궁금했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오점이 드러나는 것을 보여줄 리가 없었다. '시민케인'은 그에게 프라파겐다 영화였다. 오손 웰스(Orson Welles)는 최연소 감독으로 RKO 스튜디에 전대미문 스카웃 역사를 남겼다. 그 영화가 완성됐을 때 허스트는 76세였고 감독 각본 출연을 한 오손 웰스는 단지 24세. 당시 허스트는 그 영화를 RKO 스튜디오로 부터 80만불에 사서 불에 태우려고 했다. 전국의 신문 미디아를 장악한 허스트는 '시민케인' 영화 광고를 단 한단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뉴욕의 한 극장에서 시사회를 갖고 아카데미 오스타상 9부문에 노미네이션 되었으나 허스트의 반대 로비활동으로 시나리오 상 하나밖에 받지 못했다. 그리고 오손 웰즈를 커뮤니스트라고 허위 기사를 쓰기 시작해 오손 웰즈의 창창한 앞길을 막았다. '시민케인'에 얽힌 두 사나이의 싸움은 유명한 일화로 알려져 왔다. 그들에 관한 'RKO 281'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허스트가 88세에 사망한 후에서야 드디어 '시민 케인'은 광명을 찾기 시작했다. 필름 역사의 최고 영화로 남기 시작한 것이다. 허스트가 그 영화를 사서 태웠더라면 오늘날의 '시민 케인'과 오손 웰즈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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