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May 31, 2006

분노의 주먹(Raging Bull, 1980)

분노의 주먹(Raging Bull, 1980)

감독: 마틴 스콜세지

연기에 대하여

드니로 어프로치란 로버트 드니로의 연기스타일로 맡은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 자신의 외부적 조건을 변화시키며 역할 속에 몰입하는 것이다. 연극계의 위대한 연기 이론인 메소드 연기법(Method) 과 비슷한 의미다.
로버트 드니로는 "완벽하게 내 역할에 빠져든다"는 철칙을 고수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정통 연기파 배우이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와 <분노의 주먹>에 출연한 당시 그는 몸무게를 늘였다 줄였다 하면서 배역에 열중했다.
드니로는 늙은 라모타 역할을 하기위해 60파운드 몸무게를 늘렸으며, 같은 씬에서 조페시는 다이어트를 했다. 물론 드니로의 기록은 1987년 불후의 명작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풀 메탈 자킷(Full Metal Jacket)’에서 자살하는 뚱보 사병 로렌스 역할을 했던 빈센트 드오노프리오에게 깨졌다. 그당시 빈센트는 그 역할을 위해 70파운드를 늘였다.
그외에도 미국 창녀 에일린 우오노스(Aileen Wuornos)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몬스터(Monster, 2003)’에서 샬리즈 쓰론(Charlize Theron)은 30파운드, 크리스티나 리치(Christina Ricci)는 10파운드를 늘였다.
메소드 연기법은 배우가 자신이 맡은 역에 동화되어 감정을 느끼고 연기를 하는 것을 말한다. 러시아의 유명한 연극연출가 스타니 슬랍스키가 만들었고, 말론 브랜도같은 연극배우 출신의 명 영화배우들이 대부분 메소드 연기법을 익혔다.
엘리야 카잔 감독의 영화 ‘워터 프론트(On The Waterfront, 1954)’에서 말론 브란도가 보여준 연기는 메소드 연기의 진가를 보여준다. 깡패조직에 혈혈단신으로 대항에 노동자의 권익을 찾는 테리역의 말론 브란도는 육체의 고통뿐 아니라 불안과 희망 등 내면의 정서를 보여주는 연기를 통해 탁월한 메소드 연기를 해낸다.
엘리야 카잔은 1947년 동료들과 함께 액터스 스튜디오를 설립해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 등을 배출하면서 50년대 미국의 영화, 연극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카잔 감독의 ‘워터 프론트’에서 실용화시킨 메소드 연기는 프랑스의 장 뤽 고다르와 프랑소와 트뤼포 감독에게도 영향을 주어 이들도 배우에게 영화촬영 도중 즉흥연기를 요청하는 등 메소드 연기는 누벨바그의 한 특징을 이룬다. 이렇게 엘리아 카잔 감독이 도입한 메소드 연기는 말론 브란도와 제임스 딘을 위시하여 폴 뉴먼,캐서린 헵번, 로버트 레드포드, 페이 더너웨이,더스틴 호프만, 로버트 드 니로, 알파치노 등으로 이어진다.
메소드 연기 방법론의 중심은 배우와 등장 인물간의 동화로 축약할 수 있을 것다. 배우는 자신이 그 상황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하며, 자신의 유사한 경험이나 과거에 대한 회상을 통하여 인물이 될 것을 요구받는다. 연기는 단순히 무대 위나 카메라 앞에서만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인이 그 배역과 동화되어 자연스럽게 표출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연기론의 단점은 과잉동화의 경우 무대나 카메라 앞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배우의 연기나 행동이 돌출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메소드 방법이 연출가들에게 거릴동리 될 수도 있다. 배우은
연출가가 독특한 비젼을 가지고 연출할때, 배우는 연출가와 타협하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를 메소드 방법으로 예술가라고 내세우는 배우들과 의견이 불일치로 거림돌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일부 연출가는 독제자처럼 자기 스타일에 맞추기를 원할때 더욱더 문제점이 커질 수 있다.
미국 연기계의 3대거장 리 스트라스버그, 샌포드 마이즈너, 스텔라 애들러다.
그들은 배우들간의 교감과 상호작용 중심을 둔 자신만의 연기법을 개발하고 선택들은 행위를 창출해 낸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미리 정해 놓은 대사표현 방식에 갇히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행위가 대사표현 방식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대사는 선택으로부터 나온다. 샌포드 마이즈너(Sanford Meisner)는 그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였다. "어떤 신의 정서는 강과 같으며 대사는 그 강에 떠 있는 배들과 같다."
메소드 연기 방법은 대체적으로 많은 배우들에게 권장되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이와 반대되는 이론의 인물로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많이 거론된다. 그는 서사극을 발전시키며 동화보다는 이화나 거리두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은 변증법의 연극을 지향한다. 그가 죽음으로써 완성을 보지 못한 '서사극'은 서사적 연극, 혹은 변증법적 연극을 말한다. 기존의 연극이라는 환상을 채워보려는 현실의 좌절이나 불만을 브레히트는 서사성을 가미함으로써 연극에 놓여 있는 상황에 관객이 빠져들지 않도록 감정이입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서사극은 감정이입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깨우는 연극을 말하며 그런 의미에서 비(非)아리스토텔레스 연극이론이라고도 불리워 진다. 극단적으로 동화되지 않는 표현법이 서사극적이다.
브레히트는 서사극에서 어떤 인물의 행동을 보여주기는 하나 그 행동이나 상황을 낯설게 해서 두드러지게 하는 효과를 추구한다. 어떤 사건이나 행동의 어느 한순간, 혹은 하나의 상황을 두드러지게 돋보이게 만드는 낯설게 하기의 수법은 우리가 일상적인 것으로 넘겨버리기 쉬운 사실에 대하여 한번 더 문제를 제기해 보는 방법이다. 낯설고 두드러져서 우리의 주위와 관심을 환기시키는 이 수법은 일상적인 사실을 역사적 대사건처럼 거리를 두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새롭게 보이게한다. 동시에 그와 반대로 위대한 인물을 가능한 평범한 사람의 차원으로 끌어내려서 우리의 이웃처럼 가까이에서 바라보게 하는 작용도 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의 고정관념에 있던 사건이나 인물이나 상황이 더 눈에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그것들은 새로운 관점의 척도에 따라 평가되어진다.
브레히트는 시대에 대응할수 있는 객관적 인식의 각성과 비판의 예술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그의 문학적 이념은 하나의 사조가 되면서 아직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브레히트는 일찍이 반체제성향이 강해서 그런 사상이 그의 작품 속에서도 드러나게 됩니다. 때문에 그의 연극을 보면 극예술 자체에 목적이 있다기 보다는 사회를 개혁하고자하는 정치적 의도를 볼 수 있다. 물론, 당시에 그런 작품들이 많이 있었지만, 브레히트의 작품은 극이 갖는 정치적 의도가 완전히 극예술의 형식으로 용해되어 표현되기 때문에 관객은 극예술을 즐기면서 정치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브레히트의 말을 빌면 ”즐기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즐기는” 연극이 그의 서사극인 것이다.
그때 관객은 “아! 지금 내가 영화를 보고 있구나!” 라고 놀라면서 영화에 몰입에서 깨어난다. 이것이 브레히트적 소외효과(소격효과)다. 즉 소외효과란 잘 연기하던 배우가 갑자기 카메라를 쳐다보고 관객에게 말을 거는 것과 같은 걸 말한다.


Monday, February 13, 2006

스크린 쿼터 폐지가 죽인 천재감독 알렉한드로 조도로프스키

홀리 마운틴(The Holy Mountain, 1973)

감독: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Alejandro Jodorowsky)

스크린 쿼터 폐지가 죽인 천재감독 알렉한드로 조도로프스키

정부가 스크린쿼터(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를 현행의 절반 수준인 73일로 축소하는 방안을 전격 발표했다(2006년 1월 26일). 미국측은 한미FTA 개시 전제조건으로 스크린쿼터 축소와 소고기문제를 줄곧 거론해 왔다.
스크린 쿼터(screen quota)란, 자국영화 의무 상영 일수를 말한다.
스크린쿼터제는1927년 영국의회에서 영국내 모든 극장은 영국영화를 30%이상 반드시 상영해야한다는 규정을 담은 '영화 헌장'(Cinematograph Act)을 제정함으로서 영국에서 처음 실시되었다. 이후 프랑스·이탈리아 등 유럽 일부 국가와 남아메리카·아시아 국가 일부가 이 제도를 시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법적(영상진흥법)으로는 1966년 2차 영화법 개정 당시 명문화 되었으나 실제 시행은 1967년 1월 1일부터 이루어졌다. 한국의 영화진흥법은 모든 극장이 연중 5분의 2에 해당하는 1백46일 이상 한국 영화를 상영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미국이 세계 영화시장의 85%를 독과점한 상태에서 근래 영국 독일 멕시코 등은 10% 안팎의 자국 영화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스크린쿼터 유지로 우리는 지난 해 50%가 넘었다.
헐리우드 영화는 스타들의 개런티 비대와 터무니 없는 제작비의 증감으로 미국내 자체 수입(Domestic Sale) 만으로는 이익을 낼 수 없기 때문에 해외마켓(International Sale)에서 수입을 충당해야한다.

헐리우드 영화가 왜 그렇게 많은 제작비가 들어가는지 잠시 짚고 넘어가자. 영화 자체 순수 제작비는 영화 전체 예산에서 절반도 채 안된다. 그렇다면 절반이상을 넘는 제작비가 어디로 새어 나가는가?
우선 에이전트 시스템(Agent)이다. 헐리우드는 에이전트, 매니져, 변호사 들이 영화배우나 스탭진들보다 일은 적게 하고 이익금은 훨씬 더 많이 챙겨간다. 스타들도 그들에게 지불해야되는 엄청난 수익금 때문에 개런티 비용이 올라가는데 한 몫을 한다. 배우뿐만이 아니라 작가, 스탭들도 에니전트들이 따라다니며 수익금들을 챙긴다. 그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 많으며 가족대대로 이어오는 경우가 많다.
몇년전에 헐리우드에서 제작자 몇명이 모여 인터넷으로 작가, 시나리오 선별, 배우와 스탭진을 고용하는 웹사이트를 개설한적이 있다. 그렇게 될 경우 에이전트들이 필요없고, 영화 제작비를 많이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으로 말하면 이익금들을 제일 많이 챙겨먹는 중간 상인들을 제외시킨다는 얘기다. 그러나 에이젼트들의 거센 반발과 위협으로 그 사이트는 문을 닫아야 했다.
두번째가 파인더스 비용(Finder’s Fee) 이다. 즉 소개비용이다. 영화제작을 위해서는 투자를 받아야 하는데, 제작자가 직접 투자자와 협상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투자자와 제작자 중간에 다리를 놔주는, 즉 소개를 시켜주는 브로커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투자 성사를 시켜주고 제작비 전체에서 5%에서 많게는 20%까지 파인더스 비를 챙겨간다. 이 시점에서 벌써부터 제작비는 삭둑 잘리어 나가는 셈이 된다.
세번째가 제작자들이 제작비를 빼돌리는 경우다. 영화제작비 어카운트 장부를 만드는 것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영화 제작비가 쓰이는 곳마다 어떻게 딜을 하느냐에 따라 들어가는 비용의 액수가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필자의 영화 ‘라스트 이브(The Last Eve)’에서 베버리 힐스 저택에서 촬영한 씬이 있다. 그 로케이션은 보통 영화사들에게 하루 촬영 대여비가 5만 달러 이다. 필자는 친구의 소개로 집 주인 마크 윌버를 만나 필자의 저예산영화의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결국 마크는 촬영을 허용했으며, 공짜로 촬영을 할 수 있게 됐다. 이런 내용이 필자가 2004년 11월 말 KBS TV 1에 출연한 한민족 리포트 “서산촌놈 강영만, 헐리우드에 가다.”에 나온다.
제작자의 재량에 따라 얼마든지 비용의 삭감과, 제작자의 실수로 비용이 증감할 수 있다. 그런 조정 가능성을 이용하여 제작비의 많은 양을 빼돌리는 경우도 있다. 필자가 아는 제작자 몇명이 투자받은 제작비를 빼돌려 집을 산 것이 투자자에게 발칵되어 소송에 휘말린 것을 봤다.
스타들과 제작자들이 거액을 가져가는 반면에, 일부 스탭진들은 형편없는 월급을 받는다. PA (Production Assistant) 라는 직급이 있다. PA들은 세트장에서 제일 밑 바닥일을 한다. 그들은 제일 힘든 일을 하며 일당 $50 - $100 받아 생계를 유지한다.
네번째 불 필요한 직원들이다. 예산이 많은 헐리우드 영화 세트장에 가보면 꼴불견이다. 막상 일하는 스탭진들은 얼마되지 않는다. 나머지 스탭진들은 세트장에서 빈둥빈둥 자리만 채우며 시간을 때운다. 그들은 할일이 없고 시간이 남아, 배우들과 농담이나 찌껄인다. 그래도 그들은 꼬박꼬박 일당이 나온다. 예산이 많으니 무조건 스탭명부에 나와있는 직책들은 일단 다 고용한다. 게다가 마케딩 부서에서 일하는 사무직원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들에게 모두 월급이 나간다. 물론 모두 투자받은 제작비에서 말이다.

헐리우드 영화들은 제작비의 비대로 일년에 800 - 1000편을 만들어 낸다. 200편 이외에는 모두 쓰레기다. 그 쓰레기들로 돈을 거두어 들여야 다음 영화를 만들수 있기 때문에 해외시장을 독식할 수 밖에 없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해외시장을 독식할까.
끼워팔기 형식이다. 팻키지 딜(Package Deal)이라고 한다. 일년에 헐리우드 흥행작들은 몇편이 되지 않는다. 헐리우드는 직배사들을 통해 극장주들에게 흥행작을 주는 대신 10편정도 쓰레기들을 끼워 판다.
그럴경우 헐리우드 영화들은 물량공세로 극장의 상영일수를 잠식하게 된다. 일년내내 할리우드 영화들만 상영해도 일수가 부족할 정도로 헐리우드 영화의 물량은 대단하다. 제작편수가 적은 한국영화는 낄 수가 없게 된다. 한국영화 중 흥행이 확실한 영화만 연장되고 나머지 영화들은 일주일만에 극장에서 내려야한다. 입소문을 통해 서서히 진행되는 흥행은 기대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영화라도 금방 극장에서 내릴 경우 “왕의 남자”같은 결과는 다시는 볼 수도 없을 것이다. “왕의 남자” 처럼 마케팅 비용의 부족으로 적은 극장수를 잡아서 관객들의 입소문으로 퍼지는 데까지는 최소 몇주 시간이 필요하다. 그나마 146일이라는 스크린 쿼터제가 있었기 때문에 100일을 흥행 가능성 높은 영화로 채우고 난 후, 끄트머리에 겨우 매달려 개봉한 영화라며 이준익 감독은 스크린쿼터의 영향이 컸음을 주장했다.
진정 한국영화를 살리는 길은 한국영화들 자체에도 스크린 쿼터가 필요하지 않을까. 할리우드에 대항하여 한국영화가 40%를 스크린 쿼터를 요구하듯이 한국 메이져 영화들에 대해, 예술영화, 독립영화들의 40%의 스크린 쿼타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국 영화들도 요즘은 독식이다. 어떻게 보면 헐리우드 축소판이라고도 볼 수 있다. 몇몇 안되는 거대 계열사들이 극장체인을 독식하기 때문에 계속 조폭 영화, 흥행위주의 영화들이 계속 양상된다. 제작자들도 힘들게 작품성있는 영화을 만들는 것 보다 쉽게 흥행성 위주로 영화를 만들것이다. 그럴경우 한국 영화는 발전을 후퇴되고 홍콩 같은 결과를 맞이할 것이다.

스크린 쿼터가 지켜지지 않을 경우 폴란드나 멕시코 같은 영화산업으로 치닫을 것이다.
폴란드의 경우 80년대 1년에 70~80편 제작되던 자국의 영화는 현재 10 여편 조차 되지 않는다.
멕시코도 예전엔 100편 이상 상당히 많은 자국영화를 만드는 국가였고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같은 유명한 감독도 많이 배출하였으나 지금은 10편 미만으로 영화제작 산업이라는 것이 이젠 아예 실종되어 버렸다.
제도라는 굴레 때문에 천재 아티스트가 죽는다는 것은 슬픈일이다.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같은 천재 감독의 작품을 접한다는 것은 문화생활에서 행운이다. 필자가 그의 영화들을 처음 보았을때 충격과 함께, 영화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 사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인들은 다람쥐 체바퀴속에서 산다. 매일 같은 시간, 직장, 장소, 사람들….. 그런 삶에서 시각이나 관념도 고정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나마 문화생활을 통해 다른 세계로의 탈출을 꿈꾸며, 간접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항상 보는 진부한 내용의 영화들은 오히려 더 스트레스를 준다.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감독의 특이한 영화들은 잠자고 있는 뇌에 충격이나 경종을 울린다.
그의 영화 “엘 토포(El Topo, 1970)” 전세계 영화팬의 컬트 클레식이 되었다. “홀리 마운틴(The Holy Mountain, 1973)”, “섄타 섕그레(Santa Sangre, 1989)”등이 전세계 매니아들에게 유명하다.
조도로프스키 감독은 이외에도 헐리우드에 한이 많다. 데이빗 린치 감독의 ‘둔(Dune, 1984 )’ 영화도 원래는 도조도로프스키 감독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헐리우드의 배신으로 결국 데이빗 린치 감독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조도로프스키 감독이 만들었더라면 아마 더 훌륭한 오리지널 영화가 나왔을 것이다.
조도로프스키 감독의 영화 “Fando y Lis, 1968)가 멕시코 극장에 상영될 때, 그 도시 깡패 보스 한명이 그 영화를 너무 혐오하여 조도로프스키 감독을 죽이려고 까지 마음 먹었다. 그럴정도로 관객의 신경을 건드린 영화였다. 그 깡패에게 위스키 선물을 보내 둘이 친구가 되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런 감독의 영화들도 한번은 볼 기회를 가지라고 필자는 권하고 싶다. 거부 반응이 올 수 있어도 한번 이런 세계도 있다는 것을 경험해 보라는 것이다.
이런 영화들도 이젠 더 이상 멕시코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그는 벌써 노장이 됐다. 스트린 쿼터 폐지 제도의 희생물이다. 멕시코에 계속 스크린 쿼터가 있었더라도 이런 천재감독의 작품이 계속 더 나왔을 것이다.
우리 나라도 이런 절차를 밟지 않기를, 관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영화인의 한사람으로서 기대해 본다.

강영만 감독 홈페이지
http://www.youngmankang.com

Friday, January 27, 2006

37. 아이 로봇(I, Robot, 2004)

37. 아이 로봇(I, Robot, 2004)

감독: 알렉스 프로야스

만약 로봇이 꿈을 꾼다면.

아무리 고도로 발달된 로봇일지라도 로봇은 기계에 불과하다. 정말 그럴까? ‘아이 로봇’을 보고나면 이런 명제들이 궁금증으로 떠오른다. 암울한 인간의 미래에 로봇은 인간의 지각능력만큼 계속 발전한다. 바로 인간이 신의 경지에 다다르고 싶듯이 말이다. 구약성경에서 구약시대 인간들은 신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 바벨탑을 쌓기 시작한다. 그들이 생각했던 신은 하늘 높은 곳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다. 그들은 오랜 기간 동안 바벨탑을 계속 쌓아 올렸다. 그러나 신은 그들이 괘씸하게 여겨 그들에게 각기 다른 언어들을 내렸다. 그 후부터 그들은 커뮤니케이션이 통하지 않아 바벨탑을 더 이상 쌓을 수 없게 된다.
만약 로봇이 꿈이 있다면 인간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 2001)’ 에서 꼬마 로봇 데이빗(헤일리 조엘 오스멘트)은 인간 부모에게 양자가 되어 인간 가정에 들어온다. 그는 로봇이지만 그의 마음속에서 인간의 정을 느끼고 인간이 되고 싶어한다.
‘아이 로봇’ 에서도 로봇들이 미쳐 쿠데타를 일으켜 인간을 지배 하려 하나 실패로 끝난다.
로봇을 지배하는 것은 컴퓨터 인공지능 메인 컨트롤 마더 보드이다. 바로 그 컨트롤을 통해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다. 뇌에서 사고하는 인간처럼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
이 영화에서 로봇은 인간에게 복종하기 위해 3개 조항이 있다. 1조는 ‘로봇은 절대 인간을 해칠 수 없다.’ 2조는 ‘1조의 위반되는 경우 외에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된다.’ 3조는 ‘1조와 2조에 위반되는 경우 외에 로봇은 스스로 방어할 수 있다.’
그러나 로봇들은 3조항을 역이용해 미쳐버리고 반란을 일으킨다. 모든 능력에서 월등한 로봇들 앞에 인간들은 무력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모든 로봇이 악하게 변하지는 않는다. 수 많은 로봇 중에 하나의 로봇 ‘소니’ 만이 선한 로봇으로 끝까지 인간을 지킨다. 그는 인간처럼 윙크하며 인간 감정까지 가진 것처럼 행동한다.
만약 로봇이 꿈을 꾼다면… 그러나 이 영화에선 ‘소니’는 꿈을 꾼다. 로봇 ‘소니’가 꾼 꿈은 바로 다가오는 미래를 정확하게 예언하며 그대로 실현된다. 즉 인간을 구하고 로봇을 평정시키는 것이 바로 본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로봇 ‘소니’의 꿈과 인간의 꿈은 비교가 된다. 인간이 꾸는 꿈은 미래에 그대로 적중하는 것이 드물다. 물론 개중에는 다른 방향으로 해석되어 적중하는 경우도 있지만 100% 그대로 꿈에서 본대로 똑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꿈을 희망으로도 표현한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100%를 성취하기는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꿈이다. 그러나 로봇 ‘소니’의 꿈은 영상 그대로 정확히 시각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로봇이 꾸는 꿈은 인공지능 데이터 베이스에 의한 기억장치에 위한 반응이 아닐까?
그렇다면 만약 인간과 똑같은 두뇌를 개발하여 로봇에게 이식한다면 인간과 똑같은 꿈을 꿀 수 있을까? 그렇다고 우리는 그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자 아이작 아지모프의 단편 작들을 보면 모두 로봇과 인간의 정신 세계의 경계와 정체성에 대한 많은 의문들을 제시한다.